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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여성교육의 씨앗에서 미주 독립운동의 등불로 — 독립운동가 차인재(車仁載, 1895~1971)
1. 삼일여학교 제1회 졸업과 민족의식의 성장 차인재(이명 차우르다·임인재, 영문명 Rhoda Cha Inje) 선생님은 1895년 4월 26일 경기도 수원군 북부면 북수동(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서 태어났다.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근대 여성교육기관인 우리 학교(삼일여학교, 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3월 2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독립운동가 박충애, 홍보배 등이 자랑스러운 제1회 동기동창생이다(우리문화신문). 모교인 삼일여학교는 북감리교 여선교회 스크랜튼(M. F. Scranton) 선교사에 의해 보시동 수원읍교회(현 종로감리교회) 초가집에서 학생 3명의 ‘삼일소학당’으로 개교하였다. 전도사 이명숙과 지역 유지들의 활약으로 1년 만에 재학생이 2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장으로 부임한 밀러(Lula A. Miller) 선교사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적극적인 후원과 미국 여선교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현재의 학교 부지인 수원천로 350(매향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이후 낙후된 시설을 개선하고 4년제 ‘삼일여학교’로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박충애의 어머니이자 교사였던 김매례(김몌례) 선생은 학생들에게 투철한 민족의식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웠다.
2. 모교 교사 부임과 비밀결사 ‘구국민단’ 활동 삼일여학교를 졸업한 차인재 선생님은 서울 이화학당에 진학하여 고등과와 대학과(제4회)를 졸업한 뒤, 모교인 삼일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여성교육 보급과 민족정신 함양에 열정을 쏟았다(우리문화신문, 월간 독립기념관). 3·1운동 이후 수원 지역의 민족운동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던 1920년 6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선태·이종상(일명 이득수)을 중심으로 청년·학생 비밀결사체인 ‘구국민단(救國民團)’이 조직되었다(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구국민단은 첫째, 한일강제병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서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애국지사들의 가족을 구조한다는 2대 목표를 세웠다(월간 독립기념관). 임원진은 단장 박선태, 부단장 이종상, 구제부장 이선경, 서무부장 임효정(일명 임순남, 이화여고보), 재무부장 최문순(이화여고보), 교제부장 차인재(삼일여학교 교사) 등이 맡았다(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특히 단체 결성 과정에서 이선경·임효정·최문순 등 핵심 여성 단원들을 추천하고 연결한 인물이 바로 교제부장 차인재 선생님이었다(월간 독립기념관). 서울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던 단원들은 주말마다 고향 수원으로 내려와 매주 금요일 밤 삼일학교에 모여 운동 방침을 논의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신문』, 『대한민보』, 『창가집』, 「경고문」 등을 수원 지역에 배포하며 동지 규합에 나섰다(월간 독립기념관).
3. 도미(渡美)와 부부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구국민단 활동 중 일제의 감시와 체포 위기가 좁혀오자, 차인재 선생님은 1920년 8월 이화여전 스승인 앨리스 아펜젤러(Alice Appenzeller) 선교사의 도움으로 배편을 통해 북미로 건너갔다. 선생님은 동향인 수원 출신으로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에 정착해 있던 임치호(林致昊, 미국명 Charles Ho Lim, 1879~1951) 지사와 서신을 주고받은 사진신부로서 캐나다에서 만나 혼인한 뒤, 미국 워싱턴주 벨링햄(Bellingham)을 통해 입국하였다 부부는 초기 정착지인 북부 캘리포니아 윌로스(Willows)와 맨티카(Manteca) 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한인 공동체 형성에 앞장섰고, 차인재 선생님은 삼일여학교 교사 경험을 살려 한인 2세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국어학교(한글학교) 교사로 헌신하였다. 1925년경 대홍수로 벼농사가 큰 피해를 입자 남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산타애나(Santa Ana)를 거쳐 대공황기 로스앤젤레스(LA)로 이주하였다.
4. LA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과 독립운동·후학 양성 로스앤젤레스 남가주대학교(USC) 인근 37번가와 맥클린톡 거리(37th St. & McClintock Ave.)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한 선생님 부부의 터전은 곧 초기 LA 한인타운(Korean Enclave)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 옆 점포에서 손세탁소를 운영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 및 자녀들(안필립·안필선·안수산·안필영)과 한 가족처럼 교류하였다. 빠듯한 이민 생활 속에서도 차인재 선생님은 흥사단(단우 제203번),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대한여자애국단(총단장 역임)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며 1922년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월간 독립기념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인 1세 여성들을 조직하여 미 적십자사(Red Cross) 구호품 제작을 이끌고 미국 재무부 전시 국채(War Bonds) 판매에 앞장서 표창을 받았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및 한인장로교회 여전도회와 함께 전쟁고아원을 후원하였다. 또한 모교인 이화여대 발전 기금을 모금하고, 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한국 유학생이 미국에서 수학할 수 있도록 직접 재정보증(Bonds)을 서주며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5. 시대를 앞서간 여성상과 부부 독립유공자 서훈 중가주 딜라노(Delano)·다뉴바(Dinuba)·리들리(Reedley)의 한인 동포들과 교류한 강인한 개척자였다.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우리말을 잊지 않도록 학교 입학 전까지 한국어 사용을 엄격히 교육하는 한편, "여자일지라도 스스로 자립해 자기 일을 해내야 한다”고 가르친 선구적 여성주의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조국 독립과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남편 임치호 선생에게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데 이어, 2018년 제99주년 3·1절을 맞아 차인재 선생님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여 두 분을 자랑스러운 ‘부부 독립유공자’로 공인하였다(월간 독립기념관, 일간경기, 국민일보). |

김메례 선생님 송별 사진(독립기념관)
가운데 꽃목걸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김몌례 선생, 뒷줄 왼쪽에서 4번째부터 차인재, 박충애,나혜석이며
맨 앞의 남성은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한분인 김세환 지사(1916년 8월 24일)

북미대한부인회애국단
차인재 지사는 북미대한부인회애국단 소속으로 이 단체가 한국에 세운 기념도서관 정초식에 참석하여 창덕궁 후원에서 찍은 사진.(1966)
앞줄 왼쪽에서 6번째가 차인재 지사 (출처 : 오마이뉴스)